
입구 벽에 쓰인 두 글자 옆으로 창밖 풍경이 펼쳐집니다. 와유는 그 반대 방향의 일, 바깥의 산수를 방 안으로 들이는 일이었습니다.
몸은 방 안에 누워 있고, 마음은 산을 오릅니다. 천오백 년 전 한 노화가가 고안한 이 이상한 여행법이 올가을 인사동 5층 전시장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중국 남조 송(宋)의 화가 종병(宗炳, 375–443)은 평생 이름난 산을 찾아다닌 사람이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더는 길을 나설 수 없게 되자, 그는 다녀온 산들을 방 벽에 그려 두고 누운 채 그 속을 거닐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와유(臥遊), ‘누워서 노닌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워서’가 아니라 그 앞의 네 글자, 징회관도(澄懷觀道)입니다. 그림 속을 걸으려면 먼저 마음을 맑게 비워야 한다는 것. 와유는 게으른 구경이 아니라, 보는 일 자체를 하나의 수양으로 삼는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거닐며 노니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가 있습니다.
단국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과 동양화전공 박사동문들은 해마다 동양화론 하나를 골라 오늘의 화면으로 다시 묻는 ‘학술연구 전시’를 열어 왔습니다. 열한 번째인 올해의 물음은 이것입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을 하루 종일 ‘누워서 노니는’ 우리에게, 종병의 와유는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스물여덟 명의 작가가 저마다의 산수로 답했습니다.
도록 첫머리에 실린 박사동문회장의 글입니다.
2026년은 단국대학교 동양화전공 박사동문회 전시가 11회를 맞이하는 해입니다. 학술연구전시로 진행되고 있는 박사동문전은 그동안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동양화론의 내용들을 현대 동양화에 접목하여 연구전시 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종병의 와유(臥遊)사상으로 ‘누워서 유람하다’입니다. 와유의 바탕에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인 아무 거리낌 없이 거닐며 노니는 자유로운 삶이 있습니다.
관조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에만 머물지 않는, 물아일체와 자기와 타자를 넘나드는 세계관의 형성으로 자유의지의 발현과 경계 없는 융화로 동양의 산수에서 현대의 삶에 태도와 방식으로 참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현재 재학 중이신 박사동문님, 수료생, 졸업생, 학과 교수님들과 전시를 통해서 뜻깊은 학술연구전시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검은 문틀 하나가 바깥과 안을 가릅니다.

문 하나를 넘으면 인사동의 소란이 멀어지고 흰 벽의 산수가 시작됩니다.
“장자가 큰 나무 아래 누우라 했듯,
이 여행은 누워야 열린다.”— 신규식, 작가노트 「자연 2026」에서
『와유 臥遊』 도록에 실린 작품을 한 사람에 한 점씩 옮겼습니다. 도록 순서를 따르지 않고, 작가 노트에 담긴 사유를 따라 네 갈래로 묶었습니다. 카드 아래 따옴표 속 문장은 도록에 실린 작가 자신의 말이며, 평론에서 옮긴 경우에는 필자를 밝혔습니다.
몸이 갈 수 없는 곳을 마음이 먼저 간다. 책 속으로, 고향의 언덕으로, 아버지의 정원으로, 눈 내리는 강으로.

규방이라는 닫힌 방에 머무는 여인은 ‘한 권의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만의 드넓은 산수를 소요(逍遙)한다.

소요유는 현실 세계에 대한 망(忘)의 과정을 거쳐 유(遊)라는 초월의 종점에 도달한다.

섬의 윤곽은 있으되 결은 안팎을 가리지 않아, 나와 자연을 가르는 선은 내가 그은 금일 뿐이다.

아버지의 정원에 여러 풍경을 그려 넣은 것은 … 예전부터 전국을 떠돌며 풍경을 사생하던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작업의 일부로 편입되었을 뿐이다.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도 그림 속에서는 다시 만날 수 있다.

눈 내린 강과 차가운 한기 가득한 장소에서 홀로 자연과 일체된 상태는 … 아(我)도 물(物)도 없는 세계를 만나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중국, 일본의 수묵 표현이 ‘자연의 힘’ 그 자체의 표현이라면 하철경 작품은 ‘자연이 갖고 있는 미(美)’, 특히 ‘자연이 가진 평온(静謐)’을 미(美)로 바꾼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속을 거닐려면 길이 있어야 하고, 길은 비어 있는 곳에 난다. 여백은 남은 자리가 아니라 들어서는 자리다.

작품 속 여백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시각적 감응을 비롯하여 심리적·정신적 감응을 이끌어내는 매개로 기능한다.

나에게 태허는 모든 것이 사라진 공백이 아니라, 아직 형태를 얻지 않은 기운이 머물며 변화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부자리는 단순한 생활 소재를 넘어 인간의 온갖 감정과 무의식적 움직임을 수용하는 무한한 잠재적 공간인 허(虛)의 영역으로 재정의된다.

눈 덮인 풍경이 모든 것을 비워낸 듯 보이면서도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듯, 비움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의 조건이 된다.

배경을 흰 물감으로 채워 나가면서 처음의 비어 있던 캔버스 모습이 다시 드러난다. 이는 ‘채움’을 통해 ‘비움’을 표현하는 역설적 방법이다.

꽃과 잎, 밤하늘의 경계가 사라지고 실과 허가 서로 스며든다.

중국 회화에서 물은 화면 속 생동하는 미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채워진 것과 비워진 것이 함께 있을 때 화면은 비로소 숨을 쉰다.
떠난 것은 흔적을 남긴다. 물고기의 비늘, 떨어진 깃털, 번진 먹, 희미해진 기억. 그림은 사라진 것의 자리를 다시 거니는 일이기도 하다.

어탁은 대상을 그대로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사라짐을 전제로 한 기록이다.

방음벽 아래에서 발견된 깃털은 생명의 소실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 생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번짐과 여백은 생성과 소멸이 순환하는 시간을 품으며, 화면에는 사라짐 이후에도 오래 머무는 잔향이 축적된다.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경험 또한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흔적으로 남아 현재의 감정과 시선 그리고 삶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

삶은 시간의 축적이다. … 수평선이 존재하지 않는 화면 구성은 이러한 자아 형성의 무한성을 나타낸다.

‘預言’은 아직 실제로 도래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미래를 가리킨다.
마음이 화면에 닿으면 화면도 마음에 닿는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봄바람이, 촉각이, 꿈이 일어난다. 노닒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촉(觸)’에서 ‘감(感)’으로, 다시 ‘공명(共鳴)’으로 이어지는 미적 경험을 형성한다.

학은 고요히 서 있지만 봄바람은 이미 이곳에 와 있다.

전통과 현대의 결합, 전통과 현대정신을 이어주는 매개체. 이것은 현대 동양화에서 영원히 풀어가는 숙제이다.

일회적인 산뜻한 운필이 지어내는 상큼한 표정은 눈을 맑게 한다.

검정 현색(玄色)의 층위와 흐름 안에서 생성과 소멸, 응집과 발산이 공존하는 상태를 드러내고자 했다.

조원희의 그림은 현실과 비현실에 대한 회화적 은유이다.
10월 25일 토요일 오후의 전시장. 오영선의 그림이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는 사람’을 그렸다면, 이 사진들은 그 그림 밖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길게 이어진 흰 벽, 그 앞을 천천히 지나는 사람들. 걷고 있지만, 마음은 저마다 다른 산에 가 있습니다.




종병은 산수화를 감상하며 감흥을 통해 유(游)의 과정으로 도(道)를 체득하였고, 나는 미술 전시장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유(游)적 행위를 통해 현대적 소요유(逍遙遊)의 경지에 이른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감응하는 과정에서 ‘여백’은 중요한 매개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화가와 자연, 화가와 작품, 작품과 관람자 사이에 서로 감응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혼자 거닐던 길이 어느새 여럿의 길이 됩니다. 와유는 혼자 누워 하는 일이었지만, 전시장의 와유는 함께 걷는 일입니다.
작품은 혼자 걸리지 않습니다. 나란히 걸린 두 화면 사이의 흰 벽, 그 여백까지가 전시입니다.




나는 관람자가 화면 속에서 정해진 대상을 찾아내기보다, 가까이에서는 섬유의 결을 따라가고 멀리에서는 흐름과 여백의 관계를 느끼기를 바란다.









“자연을 그리며 그 안에 누우리라 —
거리낌 없이 마음을 내맡기니
진정한 유람이 이미 시작되어 있다.”— 신규식, 작가노트에서
도록에 실린 순서입니다. 이름을 누르면 그 작가의 작품으로 이동합니다.
천오백 년 전 종병은 늙고 병들어서야 누웠습니다. 우리는 아직 걸을 수 있는데도, 하루의 대부분을 작은 화면 속에서 누운 채 보냅니다. 다만 그 화면이 우리를 맑게 하는지는 잘 묻지 않지요. 이번 전시가 남긴 질문은 어쩌면 그것인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