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혜정 〈공존1〉 · 112.1×162.2cm · Oil on Canvas
공중에 빈 그릇 하나가 떠 있습니다. 그 아래, 백호가 붉은 문틀에 몸을 기대어 잠들어 있고 얼룩말은 등에 작은 녹색 섬을 얹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노혜정 작가의 제18회 개인전 《COEXIST》가 경남 창원 스파더스페이스 2층 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7월 서울 인사아트센터 경남갤러리에서 선보였던 〈COEXIST〉 연작이, 이번에는 갤러리의 기획 초대로 작가의 고장인 창원에서 이어집니다.
전시장을 돌다 보면 화면마다 되풀이되는 형태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빈 그릇입니다. 백호가 몸을 담근 그릇, 얼룩말이 고개를 숙여 물을 마시는 그릇, 표범과 얼룩말이 나란히 걸터앉은 그릇. 조선 백자를 닮은 이 둥근 형태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기에 오히려, 서로 다른 생명들이 함께 머무는 자리이자 그들을 조용히 받쳐 주는 바닥이 됩니다.
30년에 걸친 작업의 궤적이 담긴 다섯 화면입니다.
작품 이미지 ©노혜정
포스터의 〈공존1〉을 보실 때 — 왼쪽의 백호는 붉은 프레임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고, 오른쪽의 얼룩말은 평온하게 웅크린 채 등에 녹색 섬을 품고 있습니다. 두 존재는 마주 보고 있지만 긴장도 대립도 없습니다. 일정한 거리를 지킨 채 조용히 함께 있을 뿐입니다. 그 사이 허공에 떠 있는 빈 그릇은, 둘 중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둘 모두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면 같은 문법이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백호와 얼룩말, 표범과 얼룩말, 호랑이와 강아지. 자연에서라면 마주치기 어렵거나, 마주쳤다면 한쪽이 다치고 말았을 조합들입니다.
그런데 작가의 화면에서 이들은 서로를 해치지 않습니다. 넓은 여백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작가에게 꽃은 ‘고난의 여정에 대한 경의와 연민’이고, 얼룩말은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생명이라는 주제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가 되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래서 화면 속 선명한 줄무늬와 만개한 장미, 투명한 물방울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기억을 눈에 보이게 만든 것에 가깝습니다.
노혜정의 작업세계는 하나의 양식에 머무르지 않는다. 초기의 극사실 회화에서 출발해 생명체의 구조를 탐구하는 추상으로, 다시 입체와 설치로 확장되었고, 이후 극사실적 묘사로 회귀했다. 이러한 변화는 형식적 변주를 통해 생명과 존재, 관계와 공존에 대한 사유가 점차 심화되고 확장되는 과정이었다.
2005년 첫 개인전의 〈생성-세포분열〉 연작은 그 출발점이었다. 화면 속 유기적 형상들은 세포의 증식과 분열을 연상시키며 생명의 근원적 에너지를 상징한다. 이 시기 작가는 개별 존재보다 관계의 구조에 주목하고 있었다.
2010년 이후 〈생성〉, 〈대화〉, 〈Family〉 등에서 생명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관계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전의 세포가 생물학적 유기체의 상징이었다면, 이후의 세포 형상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은유가 된다. 생성의 문제가 결국 공존의 문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2012년 경남도립미술관 초대 개인전은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평면 회화와 더불어 선보인 설치 작업에서 회화 속 생명체들은 실제 공간으로 걸어 나와 관람자와 장소를 공유하게 된다. 작품은 더 이상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환경이 된다.
2016년 〈꽃은 나무가 되어…〉 이후 작가는 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서사로 시선을 돌린다. 얼룩말, 꽃, 물방울, 나무는 더 이상 조형적 기호만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삶과 가족사, 상실의 경험을 매개하는 상징 체계가 된다.
최근 〈Coexist〉 연작에서 백호의 흰색과 갈색 줄무늬, 얼룩말의 흑백 줄무늬는 서로 다른 종임에도 유사한 조형적 리듬을 형성하며 차이 속의 공통성을 암시한다.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넓은 여백은 빈 곳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관계를 맺고 공존하는 정신적·상징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초기의 세포분열 연작이 생명의 ‘생성’을 탐구했다면, 최근의 공존 연작은 생성 이후의 문제인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결국 이 작품은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포괄하는 것이 공존의 본질임을 말한다.
흰 벽과 나무 바닥, 그리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 그림 속 여백이 전시장의 여백으로 이어집니다.










전시 전경 10컷 · 스파더스페이스 2F 더갤러리
1996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이후 30년, 창원을 기반으로 작업해 온 화가입니다.

전시 초대장 · 「공존의 미학」 평론 부분 발췌
서로 다른 것들이 부딪히지 않고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노혜정 작가의 화면은 그 질문에 큰 소리로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백호와 얼룩말을 나란히 앉혀 놓고, 그 사이에 빈 그릇 하나를 조용히 띄워 둘 뿐입니다.
8월의 끝자락까지, 창원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