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두 「호접몽(Butterfly Dream)」 · Acrylic on Canvas
십여 년 전, 작가는 위암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생(生)과 사(死)의 기로에서 투병하던 그때, 눈앞에 나비의 환영이 나타났습니다.
그 나비를 붙잡아 온 시간이 벌써 오랩니다. 서른두 번째 개인전에 이르러, 나비는 조금씩 화면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대신 그 자리에 질서와 혼돈의 경계 자체가 들어섰습니다.
9월 16일부터 21일까지 인사아트센터 5층 경남갤러리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 변화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아래 글은 이번 전시 팜플렛에 실린 유근오 미술평론가의 평론과 작가의 전시 노트를 사진 사이사이에 옮긴 것입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벽에 서문이 붙어 있습니다. 그 전문(全文)입니다.
작가는 10여 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생(生)과 사(死)의 기로에서 투병 중, 나비의 환영을 본 후 줄곧 그 세계에서 작품을 제작해 왔다. 나비의 형상과 더불어 그때 느낀 혼돈의 이미지를 주된 배경으로 설정하여 조형성을 취해 온 것이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최근에는 나비의 환영에서 조금씩 벗어나면서 내면의 심상을 새로운 삶에 대한 뿌리로 치환시켜 '코스모스(Cosmos), 카오스(Chaos) — 그리고 호접몽에 대한 사유'라는 주제하에 작품을 제작해 오고 있다.
화면을 하나의 우주로 해석하고 코스모스, 카오스로부터 생(生)이 기원되었다는 사고(思考) 아래 작품을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 김진두의 작품이라 하겠다. 그러면서 주제를 조형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회화적 방법으로 드리핑(Dripping)을 도입하여 그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드리핑, 즉 행위의 결과물로 남은 유기적인 화면 위에 기하학적인 흰색의 점을 기계적으로 나열시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유기적인 화면(따뜻한 성질)과 기하학적인, 혹은 무기적인 점(차가운 성질)이 충돌과 융합을 거듭하면서 생성되는 긴장감과 생명성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자 함인 것이다.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질서와 무질서의 혼재, 그 경계선상에서 존재하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새롭게 질문하는 화두 아래 김진두는 오늘도 미학적 성찰과 사유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장 입구와 서문 벽 · 경남갤러리
작가는 월간 『미술세계』 2026년 8월호 표지작가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번 팜플렛은 그 지면에 실린 유근오 미술평론가의 글을 원본대로 옮겨 제작한 것입니다.
"시인이 불가능한 것을 그렸다면 그는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오도 그것이 시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바지하거나,
그것이 속한 부분이나 다른 부분을 보다 놀라운 것으로 만든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예술에서 주체와 객체(대상)의 관계는 오랜 과제 중의 하나이다. (…) 예외 없이 김진두의 작품에서도 적용되며, 그에게는 주체와 객체, 그 구조 자체가 작품의 주된 모티프가 된다.
(…) 소위 작품이란 이 주체와 객체의 길항작용 과정에서 추출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즉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이 서로 맞서며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주체는 객체를 통해 규정되고, 객체 역시 주체의 인식과 행동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관계이다. 일방통행은 없다.
김진두의 작품은 화면에 상존하며 양립하는 두 개념과 작가가 자주 거론하는 카오스와 코스모스 사이를 조율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여겨진다. 작가의 역할은 양립하는 이 두 관념 사이의 적절한 조우의 임계점을 찾아 화면에 펼쳐 놓는 것이다.
(…) 나아가 예술은 대상에 대한 반응의 주체인 작가의 손에서 시작되지만, 감상의 주체인 관객의 가슴에서 완성된다. 따라서 작가는 창작하지만, 작품이라는 또 다른 객체의 운명을 결정짓지는 못한다.

이제금 현대미술에서 대상은 단순한 수동적 피사체가 아니라 능동적 객체의 위상을 획득한다. 김진두에게 있어 이 능동적 대상은 나비이다. '능동적'이라는 수식은 주체의 이해에서 숨겨져 있는 객체의 자율성과 역사를 인식하려는 의지이며, 작품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종종 인간의 인식과 영향을 넘어서 작동하는 사물의 작용과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하간 나비를 떠나 그의 작품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오랜 기간 나비를 주제로 한 시리즈에 천착해 왔다. 언제 나비가 그의 캔버스에 날아 왔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의 변천사를 흩어보면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초창기 작품의 홍등가 여성의 누드에서 곤궁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희망의 날갯짓이 있었을 터이고, 민화의 차용에서 나비의 상징이 갖는 축원의 날갯짓을, 〈프시케〉 연작에서는 숨결, 영혼, 마음의 날갯짓을, 〈호접몽〉 연작에서는 꿈과 현실, 그리고 자아의 경계를 묻는 사유의 날갯짓을 발견할 수 있다.


〈호접몽〉 연작이 걸린 벽

'인간적'이라는 수식어는 타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주체 의식에 찌든 인간의 아집이 집결된 용어이다. (…) 인간과 동물을 포함하는 만물은 자연의 일부이고 세계를 구성하는 상이한 기능을 가진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그래서 궁금하다. 인간적 시각이 아닌 나비의 시각에는 세계가 어떻게 보일까. 인간의 망막은 빨강, 초록, 파랑 등 3개의 색을 구분하는 3개의 시색소가 있으며, 서로 합쳐져서 다양한 색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생물학계 연구에 따르면 나비는 4개의 시색소가 있어서 인간과는 달리 자외선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인간과 시세포가 다르니 분명 다르게 보이리라.
김진두의 사유가 화면에 나비로 체화되는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주체가 객체인지, 객체가 주체인지, 내가 보는 것이 나비가 보는 것인지, 나비가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인지가 애매한 꿈이 '호접몽'이다.
그림을 통해 김진두는 묻고 있다. 내가 그린 세계가 내가 본 것인가, 나비가 본 것인가? 작가가 본다는 주체의 자리를 대상에게 양보하는 아량을 베푼 결과물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다시 말해 주객전도의 역발상 그림이다.


〈프시케〉 연작과 소품들
평론가는 '주객전도'라 칭해도 무방한 김진두의 근작을 크게 다섯 유형으로 나눕니다. 전시장을 돌며 어느 유형인지 찾아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배경이 곧 날개가 되는 화면데칼코마니 배색의 배경 위에 외곽선만으로 그려진 나비 형상을 얹어, 배경의 배색이 그대로 나비 날개의 색이 되는 주객전도의 화면.
점이 나비를 만들어내는 화면나비 형상을 그렸다기보다는, 배경을 온통 잠식하는 점들에 의해 나비의 이미지가 구체화되는 것. 이 역시 주객전도이다.
겹쳐지는 사각의 틀과 꽃데칼코마니 위에 사각의 틀을 구축하고, 그 안에 다시 선으로 묘사한 꽃의 이미지를 중첩하고, 다시 나비 형상을 재중첩하면서도 그 모든 과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화면. 꽃과 나비의 공생과 진화의 여정을 역으로 드러내는 시간의 메타포.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의 융합드리핑 기법으로 밑바탕을 조성하고 그 위에 나비 이미지를 중첩하고, 다시 그 위에 기하학적 사각의 점을 오와 열을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는 방식. 일견 채집된 나비표본처럼 보이기도 한다.
입구도 출구도 없는 균질한 방어디선가 본 듯한 무의식과 현실의 접점을 표방하는 구성 공간. 균질한 사각의 방에 나비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되며, 알고리즘이 체화된 디지털 시대의 주체와 객체의 위상을 엿보게 한다.




전시장 곳곳 · 경남갤러리

따라서 그는 자신이 나비를 직접 그리지 않는다. 짐짓 대상을 그리는 것은 자신의 역할에 속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감상자에게는 이게 무슨 궤변인가 싶겠다. 눈 씻고 볼 필요도 없이, 화면에는 분명 또렷하게 나비의 형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김진두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나비는 주변부에 수없이 찍힌 점들에 휩싸여 만들어진 공판화 풍의 허상 착시 이미지임이 드러난다. 또한 날개의 색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색채는 최하층부에 도포된 바탕색에 불과하다. 결국 이 나비는 화면의 최상층부에 오롯이 위치하는 게 아니라 바탕을 이루는 하층부에 겨우 기거하는 꼴이다. 주제가 최상층부에 위치하는 통상의 인식을 뒤흔드는 방법론이다.
엄밀히 말해 김진두는 나비를 모티프로 선택한 이후 '그리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형상을 둘러싼 무수히 많은 점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찍기'이며, 화면의 바탕을 이루는 드리핑은 '뿌리기'이다. 나비의 형상 또한 점찍기를 통한 외곽 둘러싸기이다.
(…) 그는 나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다. (…) 화려하지만 정갈한, 은근히 도치하고, 전도되고, 반전하는 화면은 미술에 대한 사회적 통념과 의식을 뒤집어 깨우치는 아우성이다. 아우성은 아우성이되, 듣고자 해야 들리는 묘한 아우성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입니다. 트레이드마크였던 나비의 구체적인 형상이 일부 화면에서 지워졌습니다.
가장 최근의 형상이 소거된 채 드리핑으로만 이루어져 흡사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나비의 실종으로 감상자를 주목하게 한다. 이 화면의 모든 부분은 드리핑에 의한 얼룩과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허블 망원경으로 보는 듯한, 별빛과 가스, 먼지로 가득 찬 우주 이미지인 화면은 드리핑의 효과로 여전히 확장하는 우주의 생동감을 드러내면서 화려함을 극대화한다.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동시에 머금은, 즉 '질서를 잉태한 혼돈' 또는 '혼돈에서 떠오른 질서'로 교차 변주되는 우주는 그 어떤 질료보다 진한 검푸르고 육중한 망토를 무겁게 뒤채면서 별빛을 통해 숨을 쉬고 있다.
여기에 다다르면 감상자는 의혹의 눈길로 화면을 응시할 것이다. 낯익으면서도 다소 역설적으로 묘사되던 나비의 형상이 사라졌다. (…) 몇몇은 나비의 형상이 없는 게 아니라 화면에 스며있는 게 아닌가 하며 숨은그림찾기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연코 아니리라. 나비는 슬며시 화면에서 빠져나와 작가 옆에 자리하면서 자신이 본 세계를 협업한 주체의 산물을 감상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화면으로 돌아가는지는 주체와 객체의 길항작용에 따른다.



그의 작품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가 여기저기에 교묘히 숨겨놓은 역설의 장치들을 발견하는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것은 망망대해이거나 우주 어딘가에 작가가 찍은 점들로 만든 평평한 사각의 섬을 향해 데자뷔(Déjà vu) 호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다.
하선 후 그 장치들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김진두의 작품의 진면목을 놓치는 것이 되며, 잠시 잠깐 화폭을 배회하다 배 떠나는 고동 소리에 떠밀려 캔버스 밖으로 밀려 나와야만 하는 무심한 퇴장과 다름없는 여행이 된다.
그렇다. 여행자가 어찌 알았으랴. 자신이 객이라는 것을. 그는 단지 손님이다. 어디를 보느냐, 방문하느냐는 선택의 문제이지, 주객의 문제는 아니다. 평평한 사각의 섬은 늘 그곳에 있다. 객이 바뀔 뿐이다.
9월 16일 수요일 오후 5시, 전시장에서 개막행사가 열렸습니다. 서른두 번째 개인전을 축하하러 온 분들이 5층을 채웠습니다.



작품 앞에서, 그리고 삼삼오오



박수로 시작한 자리


기념사진 — 9월 16일 저녁

뉴스1이 이번 전시를 소개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마주한 환영을 예술적 생명력으로 승화시킨 서양화가 김진두가 32번째 개인전을 연다. 힘겨운 삶의 굴곡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 온 작가의 진정성이 관람객의 마음에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특히 이번 전시는 그간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나비의 구체적인 모습이 일부 화면에서 사라진 점이 눈길을 끈다. 형태를 지우고 질서와 혼돈의 경계 자체를 파고들며 사유의 깊이를 한층 넓혔다.
"필연적인 규칙과 우연한 무질서가 뒤섞인 틈바구니에서 나와 대상을 둘러싼 관계를 새롭게 묻고 싶었다" — 작가
1957년 경남 거제에서 출생해 마산에서 성장했다. 경희대학교 및 동대학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이후 31회의 개인전과 국제 임팩트전, 이후전, 농전, 인사동 475전, 방글라데시 비엔날레 등 국내외 초대전 및 단체전 400여 회에 참가하였다.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청담미술제 개막전 퍼포먼스 등에 참가하기도 한 작가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2회) 및 심사위원(3회)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월간 『미술세계』 2026년 8월호 표지작가(COVER ARTIST)로 선정되어, 유근오 미술평론가가 김진두의 작품세계를 「나비가 바라본 세계 — 있음직한 불가능」이라는 제명하에 기술하고 있다.
한편 작가는 8월 26일부터 9월 26일까지 선화랑에서 개최되는 범생명적 초월주의展에도 출품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