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계현 「표상(表象)」 · 130.3×162cm · Oil on canvas · 2025
무엇을 그렸는지 먼저 찾지 마세요. 김계현의 그림은 색을 먼저 느껴야 하는 그림입니다.
서양화가 김계현이 10월 7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윤의 초대로 개인전을 엽니다. 지난해 갤러리이즈 개인전에 이어 1년 만의 전시로, 가로세로 2미터에 가까운 대작에서 손바닥만 한 소품까지 유화 22점이 걸립니다.
제목을 보면 숲, 햇빛, 물, 꽃, 억새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화면 어디에도 나무나 해, 꽃잎은 보이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겹치고, 밀려나고, 비워진 색의 흔적뿐입니다. 자연을 지나온 뒤 마음에 남은 감각을 그린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작가노트와 작품 해설을 작품 사이사이에 엮어, 전시장을 한 바퀴 도는 순서로 옮긴 것입니다.
비워낸 자리에 떠오른 건
마음 구석 켜켜이 쌓아온 표상들이다.
전시의 문을 여는 것은 130.3×162cm 크기의 두 대작입니다. 붉은 「표상」과 푸른 「심상」, 정반대의 온도를 지닌 한 쌍입니다.
작가에게 '표상'은 눈앞의 대상을 옮겨놓는 일이 아니라, 삶과 자연 속에서 축적된 기억과 감정이 다시 떠오르는 과정이다.
작가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비워내고, 그 과정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 있던 기억과 감정의 잔상을 화면 위로 불러낸다.
《표상》이라는 제목은 이번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포스터를 장식한 작품입니다. 멀리서 보면 한 덩어리의 주홍빛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붉은 결 사이로 보라·청록·노랑의 가는 선들이 촘촘히 엉켜 있습니다.
하나의 색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수없이 많은 색의 겹이라는 것. 작가가 말한 '켜켜이 쌓아온 표상'이 바로 이런 모습일지 모릅니다.

같은 크기, 정반대의 온도입니다. 하늘빛 화면 위로 흰 결이 물결처럼 일렁이고, 그 아래로 짙은 파랑이 점점이 가라앉아 있습니다.
'마음에 떠오른 모습'이라는 제목처럼, 바깥의 풍경이 아니라 마음속 풍경입니다. 붉은 「표상」 옆에 두고 보면 두 그림이 서로를 더 선명하게 만듭니다.
덜어낼수록 깊어지고 채울수록 선명해지는
마음의 모양들.
60.6×72.7cm 크기의 중간 작품들입니다. 같은 크기의 캔버스가 색에 따라 얼마나 다른 온도를 갖는지 차례로 보시면 좋습니다.

《Within the Sun》에서는 강렬한 주황과 붉은색이 화면 전체를 휘감고, 그 사이로 노랑과 짙은 청색이 충돌한다. 이것은 태양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했다기보다는 빛과 열기, 생명력이 몸 안에서 퍼져가는 감각에 가깝다.
붓질 역시 일정하지 않고 긁히고 밀리고 겹쳐지면서 상당히 본능적인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반대로 《숲의 호흡》에서는 청록과 녹색, 파랑이 중심을 이룬다. 숲의 나무나 잎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는데도, 화면을 보고 있으면 물과 나무, 빛이 겹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생긴다.
여기에 김계현 작가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자연의 형태를 그리지 않고, 자연을 경험했을 때 남은 감각을 그린다는 점이다.


《Turquoise Blue》는 더욱 극단적이다. 화면 전체가 거의 하나의 푸른색 장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수많은 작은 흔적과 색의 층이 존재한다.
멀리서 보면 고요하지만, 가까이에서는 끊임없이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일곱 해 뒤에 그린 《Whispers of Water》는 같은 크기, 같은 푸른 계열이지만 결이 다릅니다. 하늘빛·청록·연보라가 잘게 부서져 겹치면서, 햇빛을 받은 수면처럼 반짝입니다. 물이 속삭이는 소리를 색으로 옮긴다면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올해 그린 45.5×53cm 소품들입니다. 작은 화면마다 색이 바뀌고, 그때마다 계절과 정서가 바뀝니다.

《마젠타 카프리치오》는 조금 다른 성격이다. 흰 여백 위에 분홍, 자주, 보라, 파랑이 흐르고 끊기고 다시 겹쳐지면서 마치 음악의 즉흥연주처럼 움직인다. 'Capriccio'라는 제목도 자유롭고 즉흥적인 성격과 잘 연결된다.
형태를 완성하려 하기보다는 물감이 남기는 우연한 흔적과 작가의 행위가 만나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그림이다.
이 작품을 포함해 《Euphoria》, 《Sunlight Through the Leaves》, 《산울타리 너머》 등 2026년의 소품군에서도 색을 통해 각각 다른 정서와 자연의 감각을 변주하고 있다.

다홍과 분홍 사이로 노랑이 터져 나옵니다. 리플렛 안쪽 첫 장을 연 작품, 제목 그대로 '환희'입니다.

연두와 노랑 사이로 짙은 초록이 점점이 박혀 있습니다. 나무 아래서 올려다본 잎 사이 햇살입니다.

자주와 초록, 회백색이 뒤엉켜 있습니다. 울타리 너머로 언뜻 보이는 정원처럼 무언가가 가려졌다가 다시 드러납니다.

짙은 파랑 위로 흰빛과 노란빛이 꽃가루처럼 흩어졌습니다. 영어 제목처럼, 푸른 기운을 누군가에게 띄워 보내는 편지 같은 그림입니다.

잿빛과 흰빛 사이로 노랑·초록·보라가 작게 피어납니다. 들판 한 귀퉁이를 덮은 이름 모를 꽃들처럼.

분홍·하늘·보라가 잘게 부서진 사이로 노란 빛이 반짝입니다. 기억은 이렇게 조각조각 빛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갈비뼈 아래 가만히 얹힌 것들을
조심히 더듬다 보면
지나온 날들이 머물다 간 자리가 보인다.
빽빽하게 채운 화면 사이사이에, 넓은 흰 여백을 남긴 그림들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비움과 채움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은 색이 화면을 빽빽하게 채우지만, 《비움-사이》처럼 넓은 흰 공간을 남겨두기도 한다.
김계현에게 '비움'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기보다, 기억이나 감정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에 가깝다.

흰 바탕 위로 짙은 군청과 청록이 위에서 아래로 겹겹이 내려앉았습니다. 위쪽과 가장자리에 남긴 여백 덕분에 짙은 파랑이 답답하지 않고 숨을 쉽니다.
제목 그대로 '맑음의 숨결'. 비워 둔 자리가 있어야 채운 자리도 선명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흰 화면 왼쪽으로 진홍이 번지고, 연분홍이 그 위를 덮으며 흘러넘칩니다. 장미 한 송이를 그리는 대신, 장미가 피어 넘치는 순간의 기분을 그렸습니다.

연보랏빛 회색 위로 연노랑과 연두가 아른거립니다. 얇은 베일 너머로 비치는 얼굴처럼, 거기 있다는 것은 알지만 또렷이 보이지는 않는 그림입니다.
「표상」·「심상」 다음으로 큰 올해 신작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조용한 화면이라, 오래 서서 보게 됩니다.
72.7×91cm 크기의 두 점입니다. 붓질의 방향과 결이 그대로 바람이 되고 흔적이 됩니다.


「억새풀과 너울춤」은 연두와 노랑의 짧은 붓질이 한 방향으로 비스듬히 쓸려 가며 화면 가득 흔들립니다. 억새 한 포기 그리지 않았는데도, 바람에 너울너울 춤추는 가을 들판이 떠오릅니다.
「Vestige」는 '흔적'이라는 뜻입니다. 잿빛 붓질이 소용돌이치는 사이로 하늘빛이 언뜻언뜻 비칩니다. 지나간 것이 남기고 간 자국, 그 사이로 새어 드는 맑은 빛.

같은 38×45.5cm 화면을 한 가지 색으로 빽빽하게 채운 두 점입니다. 전시를 처음 연 「표상」·「심상」의 작은 메아리처럼 보입니다.


이번 출품작 22점을 전체적으로 보면 빨강, 파랑, 청록, 초록, 분홍 등 색채의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작열》과 《BLUE》는 각각 붉은색과 푸른색의 밀도 높은 색면을 보여주고, 《A Fleeting Canopy of Green》에서는 다시 녹색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풍경이나 하나의 이야기를 이어 보여주는 전시라기보다, 각각의 색이 서로 다른 기억과 감정의 온도를 담고 있는 전시다.
김계현 작가의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를 찾기보다 색을 먼저 느껴야 한다. 숲과 햇빛, 물, 꽃처럼 작가가 지나온 자연의 기억들이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색과 흔적으로 남아 있다.
물감을 겹쳐 올리고, 다시 밀어내고, 비워내는 과정에서 작가 자신의 기억과 감정이 드러난다. 그래서 같은 추상화라도 작품마다 온도와 호흡이 조금씩 다르게 느껴진다.
김계현은 자연과 삶에서 마주한 순간의 감각을 마음속에 축적된 기억과 결합하여, 색의 겹과 흔적, 비움과 채움의 반복을 통해 내면의 풍경으로 풀어내는 작가이다.
비워낸 자리에 떠오른 건
마음 구석 켜켜이 쌓아온 표상들이다.
덜어낼수록 깊어지고 채울수록 선명해지는
마음의 모양들.
갈비뼈 아래 가만히 얹힌 것들을
조심히 더듬다 보면
지나온 날들이 머물다 간 자리가 보인다.
그곳에 나를 세워본다.

2019년 뉴욕 K&P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연 뒤 혜화아트센터(2021), 갤러리이즈(2025)를 거쳐 이번 갤러리윤 초대전에 이르렀다.
미국 뉴욕·뉴저지와 LA, 프랑스 옹플뢰르, 스위스 취리히의 전시와 아트페어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경남미술협회, 경남여성작가회 회원.
2026 갤러리윤 · 2025 갤러리이즈 · 2021 혜화아트센터 · 2019 K&P Gallery New York (NY, U.S.A)
2026 28th ART INTERNATIONAL ZURICH 2026 (PULS 5, Zurich, Switzerland) · 2025 7° Festival Culture Coréenne 'KOREA LIVE' 2025 HONFLEUR (Honfleur, France) · 2024 조형아트서울 2024 (코엑스) · 2019 LA ART SHOW (LA Convention Center, U.S.A) · 명동국제아트페어 (L7 롯데호텔)
2026 경남여성작가회 정기전 (성산아트홀) · 2025 경남여성작가회 소품전 (삼진미술관) · 진주여자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100인전 (경남문화예술회관) · 2020–2021 혜화아트센터 174인 작가와 함께하는 소담한 선물展 · 2020 ART MORA Group Exhibition (NJ, U.S.A) · 2019 NYA Group Exhibition (NYA Art Center Townley Gallery, NY) · Spring Collection (K&P Gallery New York) · 2017 5 Artists Exhibition (K&P Gallery New York) · 2014 Summer Art Show Exhibition (Palisades Park Library Multimedia Center, NJ)
2025 제44회 · 2024 제4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안산문화예술의전당) · 1994 제1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국립현대미술관) · 1991 제14회 경상남도미술대전 특선 (경상남도문화예술회관)
모두 Oil on canvas. 전시장을 둘러보실 때 길잡이로 쓰세요.
전시는 10월 7일 수요일에 문을 엽니다.
인사동길을 걷다 갤러리윤 1층에 들러, 색을 먼저 느껴 보세요.
전시가 열리면 현장 소식을 이어서 전해 드리겠습니다.
서울 인사동길 한가운데, 광릉빌딩 1층입니다.